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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택 목사 카나다서 소천

기사승인 2020.10.25  00: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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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택 목사 카나다서 소천

김종희목사(전 경신학교 교목)

   
 
순교자 후손으로 선친 고 조석훈 목사의 순교 정신과 유업을 이어 성공적인 목회를 하신 3남 조영택 목사님 하늘나라로 이사가시다.

유족으로는 사모님이 건강하시고 슬하에 4남매 아들은 언어학을 전공하고 한동대교수 딸들도 모두 신학 음악을 전공하고 총장으로 각곡가로(하나님의 은혜 작사 막내딸 조은아) 교계 교육계 음악계 등 미국과 한국 교회와 사회에 혁혁한 공헌을 함으로 순교자 할아버지의 순교의 피를 더 빛내고 있다.

1950년 동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든 해 10월 15일 7남매(4남 3녀) 어리디 어린 자녀를 험악한 세상에 남겨두고 45세 젊은 나이에 순교하신 조석훈 목사의 순교기록을 소개합니다.

아들 넷 중 두분은 합동측 목사 두분은 통합측 목사 딸 두분은 목사 사모 딸 한분은 전도사로 한국교회 복음선교에 혁혁한 공로자들이다. 초대교회 교부 순교자 터툴리안(Tertulian)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터)이라고 했다. 조석훈 목사님의 순교의 피가 7남매 목회자의 씨앗이 되었다. 기독교선교역사상 흔치않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특별히 엄혹한 전시상황에서 피란생활을 하시면서 7남매를 모두 목회자가정이 되게 하신 순교자 조석훈 목사님의 사모님은 실로 위대한 어머니시다.

고 순교자 조석훈 목사님 순교 이야기.

”양떼를 두고 목사가 어디로 도망하니까?","하나님이 이 제단 지키라고 명령 하셨는데 저는 못갑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피난 하셔야지요. 공산당이 저리도 포악하니 어찌 안전을 기대하겠습니까? 목사님. 피난하십시다.“ 그러나 성도의 간절한 권유에도 조석훈목사는 얼굴에 웃음을 뛰우고 고개를 저었다. ”양뗄를 두고 목사가 어디로 도망하니까? 하나님이 이 제단 지키라고 명령 하셨는데 저는 못갑니다. 어서 성도님들이나 떠나십시요. 몸조심하십시요.“ 교인을 떠나보내는 목사나, 목사를 두고 떠나는 성도는 목이 메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어서 더나십시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데 제게 무슨 변고가 있을라구요. 성도님. 어서 가십시요.“ 조목사는 그때 신경통을 앓고 있어서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는 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떠나는 교인의 등뒤에서 손을 흔들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석훈은 1905년 9월 황해도 송화 군 윤리면 세진리에서 조호규(趙浩奎)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고 먼저 예수를 믿은 어머니를 따라 윤리교회에 나가면서 예수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유가 학풍에 젖었던 부친은 ”사내 녀석이 믿을 종교가 없어서 야소교에 미치느냐“고 호되게 꾸짖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석훈은 재령으로 나가 재령 고등성경학교에입학을 했다. 고등성경학교 학생이라고 하지만 나이가 20세가 넘었던 터라 조석훈은 학생시절부터 조사로서 활동을 했다. 교역자가 없는 미자립교회인 장연군 태탄교회를 시발로 용현교회,두현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성경학교 졸업후에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해서는 무려 입학한지 16년만에 졸업을 했다. 1929년 입학해 해방이 되고나서 44회로 졸업을 했다. 당시 신학교는 3년제라고 하지만 3년에 졸업하는 이가 드물었다. 대개는 한 학기 공부하고 한 학기 쉬는 식으로해서 늦어도 10년이면 졸업을 했는데 조석훈이 어떻게 해서 18년동안이나 재학한 것인지는 많은 서명이 필요없다. 조석훈은 미자립교회를 떠돌며 목회를 하다보니 학비도 여유가 없었지만 보다 그본적인 것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는 신앙혼 때문이었다. 전도사는 그래도 목사들처럼 정면에 나타나지 않아도 되었고, 그는 시골교회를 담임하다보니 그 어려운 시절에도 용케 신사참배를 안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일제 말엽에는 신학교가 페쇄되는 바람에 한껏 늦어져 해방후에나 졸업을 했던 것이다. 조목사는 1948년 졸업하고 황해노회에서 안수 받은 후 은율군 일도면 누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해방후 조목사의 고향인 송화군 윤리면에서는 조목사의 덕망이 돋보여 면장으로 부임해 달라고 요청이 쇄도했다. 면장이라면 지역 유지였고, 생각 하기에 따라서는 목사들 중에는 의회의원으로 진툴할 사람도 있었고, 지역 행정 책임자가 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목사는 그들의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주님을 위해 부름받은 몸인데 무슨 면장을 하겠습니까? 저를 추대해준 사람은 잊지 않겠지만 면장으로 부임하지는 못합니다. 더 유망한 이를 세우주시지요“ 조목사는 세상에 눈돌리지 않고 오로지 목회 일선에만 섰다. 그러다가 1950년 누리교회에서 6.25를 맞은 것이다. 6.25가 나자 조목사는 교인들에게 월남하기를 권면했다. ”공산정권 하에서 편하게 살기는 애시당초 틀렸습니다. 차라리 자유대한으로 가십시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한으로 가십시요.“ 처음 교인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기가 망설여졌지만 조목사의 권면에 설득되어 속속 고향을 떠났다. 조목사는 죽음을 각오한 듯 교인도 없는 강단를 지키며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찬서리가 내릴 부렵, 유엔군이 북으로 진격해 올때 공산군은 조목사를 연행했다. 조목사는 가족이 보는 앞에서 지팽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끌려갔다. 그 모습은 흡사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를 연상케 했다. 그때 마침 소 달구지가 그 앞으로 왔다. 조목사는 달구지 위에 앉혀져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음메에“ 달구지를 끄는 황소도 애달픈지 길게 울고 있었다.

이윽고 소달구지가 외진 산 모퉁, 한적한 곳에 이르자 공산군은 소달구지를 세웠다.”내리시지요.“ 공산군은 죽일 사람이 목사라 하지만 고결한 인품을 지닌 이였기에 정중했다. 조목사는 공산군의 손에 끌려 숲속에 조용히 세워졌다. 사형집행이 내려지기 전이었다. 조목사는 하늘을 향해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 ”주여! 저에게 마지막까지 성업을 완성케 하셨아오니 감사합니다. 이 몸 주의 품에 받아주소서“ 10월 15일 조목사는 공산군의 총에 순교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7남매는 온전히 주의 제단에 바쳐졌으니 아들 넷은 목사, 딸둘은 목사부인, 딸 하나는 전도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복음의 초석이 되었다. 맏아들 조의택목사는 공주중앙교회를 시무하다가 은퇴하였으며 그의 두 아들이 조성모 목사와 조윤모목사이다. 둘째아들 조인택목사는 시카고 겟세마네교회를 시무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교회 조진모목사가 그의 아들이다.

셋째아들 조영택목사는 순교자 유족회 초대 회장이었고 서울 장석교회에서 16년간 목회하다가 지금은 카나다 밴쿠버에서 목회하고 있으며 조영택목사의 아들 조준모는 언어학박사 과정을 하고 있는데 성서번역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넷째아들 조유택목사는 서울 남대문교회를 시무하고 있으며 서울노회장을 지냈다. 맏딸 조선희는 영동중앙교회 백상근목사 부인이고 둘째딸 조선옥은 인천 선목교회 여전도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셋째딸 조송산은 서울동숭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는 등 모두 주님을 섬기는 순교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순교신서Ⅲ. 순교열전(1)396-399쪽과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163번에서 2006년 8월 29일

위 조석훈 목사 순교기록은 김종희 목사가 정년은퇴후 순24명의 자료를 PC 입력하면서 정리한 자료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란에 한국교회 순교자를 검색하면 240명의 순교자가 사진과 함께 가나다 순으로 소개되어있습니다.

저는 조영택 목사님이 목회하신 장석교회에 초청을 받아 1980년을 전후로 4년간 장석교회 교육목사로 중고등부와 청년사역을 했을때 조목사님 곁에서 봉사했습니다. 조목사님 설교도 힘 있게 잘 하시고 항상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고 성품이 브드럽고 진취적이며 포용력이 넓으시고 낙천적이시고 인자하며 전형적인 목회자로서 성악가 못지 않은 미성의 소유자로 노래를 좋아했고 지병이 있으시면서도 내식하시지 않고 목회에 전념하셨다. 한 마디로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서 사신 분이시다. 참으로 닮고 싶은 모범적이고 훌륭한 목회자셨다. 너무 일찍 가셔서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었다.

.고 조영택 목사님은 나보다 신학교 선배시고 바로 아래 조목사 동생 4남 조유택 목사는 나보다 신학교 1년 후배로 기숙사에서 2년간 같은 기숙사방에서 동고동락했다. 그 때 들은 이야기인데 남대문교회를 목회하신 조유택 목사의 말로는 선친께서 순교후 어린 나이에 월남해서 피란민으로 살면서 껌팔이까지 해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10대 이하 4형제를 남기시고 아버지가 폭격에 돌아가셨지만 조목사님 7남매가 엄혹한 전시하에 홀어머님을 모시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만해도 힘든다. 7남매를 모두 한국의 모범적인 목회자 가정으로 양육하신 사모님은 실로 훌륭하신 모친이시다. 고 조영택 목사님을 애도하면서 김종희

한국교회 순교자기념관에 240명 순교자중 한 분으로조석훈 목사님의 영정이 모셔있다.

김종희 목사 webmaster@pck-goo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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