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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슬러 재단과 신영순 선교사의 북한 장애인 사역

기사승인 2019.03.18  10: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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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킨슬러 재단과 신영순 선교사의 북한 장애인 사역

킨슬러 재단이 태동하게 된 역사는 1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8년 미국장로교회(PCUSA) 파송으로 한국의 선교사로 온 Francis Kinsler(권세열) 목사가 그 초석이다. 그는 약관 24세로 한국에 와 평양에 있던 평양신학교(현 장신대 전신)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친다. 그 외에도 평양시내 가난하여 학업을 잇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1929년 ‘개척구락부’ 라는 이름으로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 한다.

   
                              * 아소교장로회 신학교(장로회신학교) 학생들과 하단 맨 우측

훗날 ‘聖經具樂部’ 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데 당시 일경들의 주시를 받아 취조를 당하였는 데 ‘개척구락부’ 는 안된다고 해서  ‘성경구락부’ 로 개명을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 자료는 평양노회 고 김찬호 목사(구로동교회)와 함께 한 '대한 성경구락부' 라는 단체(기독교회관)에 그 자취들이 남아 있다. 이렇게 세워진 구락부을 통하여 당시 정식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고 그 과정을 통하야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다.

이렇게 북한에서부터 교육사역을 시작한 권세열 선교사는 42년간 남북한에서 각각 학생들과 전쟁고아와 미망인들 복지사역등을 감당하다가 1970년 정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런 공로로 대한민국으로부터 5.16 민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양에서 태여난 아들 Art Kinsler(권오덕)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1972년부터 2012년 2월 까지 미국장로교단 파송 한국선교사로 40년간 사역하고 역시 은퇴한다.

   

                                           * 숭신고등성경학교(앉은이가 킨슬러)

권오덕 목사는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가 미국장로교단의 군목으로 월남전에 참전한다. 1972년 제대를 하고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부임을 하게 되는 데  첫 사역은 미8군 산하(동두천) 기지촌에서 미군가족들을 볼보는 사역을 하다가 1973년에는 한남동으로 1979년에는 순천등 전라도 지역에서 산업체 선교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1968년 권오덕 목사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을 한 것이 큰 계기가 된다.

그가 바로 신영순 사모(미국장로교 은퇴 선교사)인데 신영순은 권오덕 전도사가 서울 성광교회에서 봉사할 때 당시 그 교회에서 반주을 하던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처음 만난다. 그후 열애 끝에 1968년에 양가 가족들과 김동수 목사의 주례로 혼인을 하고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같이 선교사로의 삶을 살게 된다. 신영순 사모는 1978년순천에서 ‘전남 순천 애양재활기술학교’에서 사역하게 되면서 장애인 사역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장애을 갖은 막내 딸을 갖게 되면서 더욱 연민을 갖게 된다.

   
                                                  * 신영순 선교사와 두 아들 (요한과 능재)
권오덕 선교사와는 2남 1녀를 두웠는 데 장남 요한(49세, 서울여대 교수)과 능재(47세, 하와이 고교 교사)그리고 딸 일레인이 있는 데 막내 딸은 장애인으로 미국 LA근교 한 요양원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킨슬러 가문은 시부인 권세열 목사만이 아니라 그의 두 누님(권수라, 권신라)까지 모두 서울과 대구에서 사역한 미국장로교회의 내한 선교사 가족들이었다.
   
                                   * 왼쪽 두번째 부터 권신라, 권도희, 권세열 선교사 가족
신영순 선교사와 남한의 장애인 사역

1990년 3월경 신영순은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조찬기도회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편지를 드리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1991년 6월 정부로부터 156평 건물을 부여 받게 된다. 그리고 거기를 ‘번동 코이노이아의 장애인 보호 작업장' 이라는 명하고 장애인을 위한 봉재공장과 정신지체 장애인들에게 자활과 그림을 그리는 작업장으로 발전 시킨다.  거기서 원장으로 봉사하다가 1997년 12월 온누리 교회에 이양하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97년 북한이 수해와 식량난으로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된다.  남한 사회는 이제 먹고사는 문제는 없는 데 아직도 북한의 어린이들과 장애인들은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런 연민의 아픔을 간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1998년 당시 북한의 결핵퇴치 사역을 하던 유진벨 재단과 함께 북한의 진료소를 방문하게 된다.

참상을 목격한 후 신영순 사모는 이 재단의 결핵사업을 지원하다가 2000년 미국장로교 대표단의 일환으로 당시 미국장로교 아시아지역 총무 김인식 목사님과 같이 해외동포의 자격으로 북한에 다시 가게 된다. 당시 북한의 현실은 어른들도 그렇치만 어린이들이 식량난과 질병에 고난의 행군으로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01년부터 미장로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비교적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개인자격으로 북한을 돕는 사업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귀한 일이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리고 공적사역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안을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도가 이뤄지게 된 것은 시부인 권세열 목사가 유산으로 선한 일에 쓰라고 10만 달러를 준 것이 종자돈(SEED MONEY)이 된다. 이것을 통하여 신영순 선교사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돕는 봉사를 하게 된다. 이런 일이 지인들과 미국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후원하는 교회와 개인들이 생겨나게 되되자 이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 '등대복지회 를 만들어서 이사회와 정관을 만들고 직원도 두게 된다.

   
 
등대복지회의 북한 장애인 사역

이렇게 '등대복지회' 는 2004년 3월에 조직되었는 데 초대 이사장으로 남편인 킨슬러 목사를 추대하려고 하지만 사양을 한다. 그래서 유진벨 재단의 인요한 박사(세브란스 의사)를 이사장으로 선임을 하게 된다. 그러나 6개월 만에 개인적인 일들로 인하여 사임을 하고 다시 할 수 없어 킨슬러 목사를 이사장으로 추대하여 2010년 12월 말까지 많은 성과를 내면서 지내오게 된다.

그리고 킨슬러 목사는 은퇴를 1년 앞두고 한국교회에 이 사업을 이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당시 북한선교에 관심이 있던 평양노회의 손달익 목사와 장창만 목사를 만나 장 목사를 북한에 2번 모시고 갔고 이에 감동을 받아 북한 장애인사업을 돕겠다고 자원하게 된다. 이에 2009년 12월 30일 손달익 목사를 이사로, 장창만 목사를 등대복지회 이사장으로 신영순 사모가 직접 추대를 하게 되지만 취임 1달 만에 설립자인 신영순 사모가 없는 자리에서 해임결의를 한 것으로 인하여 이별을 한 것이다.

당시 등대복지회는 킨슬거 가족이 낸 출연금 3억원 정도와 통일부 산하 기관으로 북한 5개 지역의 고아와 11개 장애인 시설과 특수학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회가 이들을 사임케 하므로 이들은  모든 것을 두고 재단에서 나오게 되자 킨슬러 목사는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조용히 물러나자고 하여  그 뜻을 따른다. 그러나 터무니 없는 음해와 공작으로 쫒겨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더 이상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두 번의 실패를 통하여 얻게 된 교훈

당시 등대복지회는 2007년 북한장애인을 돕는 사역의 성과를 인정받아 북한정부로부터 평양시내 병원 거리에 3천 6백여평의 대지를 기증받고 “평양장애인종합복지관” 을 짓자는 사업을 제안받게 된다. 그렇게 되어 “조선장애인보호련맹중앙위원회” 와 나는 개인자격으로 그 사업의 책임자로 위촉되는 무거운 책임을 받게 되어 사무실을 제공받게 된다.

당시 북한이 어렵지만 장애인들의 실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가장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요 킨슬러가의 정신과 신앙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이 사업을 돕는 데 일념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북한사회와 국제사회의 환경은 이 일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 후 북핵실험등으로 더욱 어려워져만 가게 된다. 그렇치만 북한의 장애인 사역을 중단할 수 없어 등대복지회 초기부터 이사로 활동하는 곽수광 목사를 공동 이사장으로 하여 “푸른나무 공동체” 라는 법인을 세워 이 사역을 지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 법인도 북한 사역으로 ‘민족화해상’ 을 받는 등 국내외적으로 큰 성과를 내면서 통일부에도 모범적인 법인으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원치 않게 한 실무자의 은혜롭지 못한 전횡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는 이사들과 갈등으로 눈물을 머금고 다시 공식적인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에 밀려있는 장애인을 돕는 사역도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동안 2개의 법인에서 실패한 우리는 더 이상 지치고 힘들어 사업을 포기지경에 이르렀다가 주변의 권유로 다시 직접 법인을 만들게 된다.

결국 2017년 4월 미국 중앙정부와 캘리포니아에 ‘킨슬러 파운데이션’ 을 발족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거사를 다시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은혜롭지는 않치만 역사에 진실은 남기기 위한 것이지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킨슬러 가문이 한국교회에 보여준 헌신과 사명에 대한 댓가가 이런 것인가?

사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킨슬러 가문이 세운 ‘성경구락부’ 도 한 개인에 의하여 사유화되는 것은 아닌 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고 김찬오 목사님 시절부터 사무국의 전횡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들이 누군지도 잘모르겠고 노령화 되고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데 더 이상 방치되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선교부가 한국교회에 이양한 사역이나 재산들은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고 이양되야 한다는 입장이다.

   
 
킨슬러 재단의 미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킨슬러 재단’ 을 세우게 된 것인데 이런 과거사는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한다. 그러한 배경은 신영순 사모가 지난 20년 동안 북한을 130번 드나들면서 관계를 맺은 북한 장애인연맹지도자들과의 관계와 기대를 저벼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킨슬러 가의 며느리로 그리고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받은 사랑과 사명을 지속적으로 감당하기 위하여 남은 생애를 헌신하기를 원하고 있다.

신영순 선교사는 지난 16년동안 "조선장애자보호련맹중앙위원회" 인데 2012년에는 북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남북, 해외의 장애인들의 협력을 하도록 "민족장애인원아협력사무소" 의 공동소장이 된다, 이것의 의미는 대단한데 평양에 신영순 선교사가 상주할 수있는 사무소를 준 것이다. 그리고 중국 심양에 지부와 사무소를 그리고 미국 씨애틀에 미주 사무소로 등록이 되어있다.

현재 북한의 고아들과 장애인들은 유엔과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하여 누구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조선장애자보호련맹’ 중앙위원회는 '킨슬러재단' 과 유일하게 협약을 맺게 되었고 신영순 선교사를 대표로 모든 것을 위임받기에 이른다.

북한의 각도에는 1959년부터 시작된 8개의 농아학교들과 3개의 맹인 학교가 있다. 그리고 평양 대동강 구역에 7년 전에 시작된 정신지체 자폐 어린이 회복원이 있다. 장애인 특히 어린이 문제는 늘 뉴스의 화제에서 뒷전입니다. 이는 남북한이나 조미간의 핵이나 정치, 군사 체육등의 다변화하는 교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권의 국가로 상대적인 가난은 있어도 절대 빈곤과 굶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피를 나눈 북녘동포들 특히 어린이들과 장애인들의 고통은 이루말할 수가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후에도 가뭄과 수해로 인하여 인한 식량난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2006년 이후고난의 행군을 끝나자 마자 2010년 부터 긴장이 고조된 남한의 5, 24 조치로 인한 대북제재로 인하여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북한은 자라나는 세대들을 향한 지원과 관심으로 고아들과 청소년들의 발육과 건강을 점차 좋아지는 가운데 있다.

   
 
작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 북한의 장애인 선수 참가 후원

2017년 4월 평양에 가서 김문철 위원장에게 남측 평창에서 세계동계올림픽이 2018년 2월에 열리는 데 여기 장애인올림픽도 열린다. 북한이 당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냉전상황속에서 선수나 장애인들도 한두명이라고 참가를 한다면 돕겠다고 하여 2017년 11월 말 3명의 선수들과 감독, 코치를 중국 할빈으로 불러 훈련을 하였지만 취소된다. 그리고 다시 중국쪽 장백산 산골 스키장에서 2주 동안 카나다 장애인 코치를 초청한다.

그리고 신영순 사모는 남한에서 크로스 컨츄리 스키 장비들을 준비해서 영하 30도가 오르내리는 추위속에 처음으로 스키훈련을 하도록 돕는 다. 그리고 북한 장애인 선수와 대표단이 평창 동계 올림픽에 참전 할 수 있는 경비도 지원하게 된다. 당시 북한의 참가가 불투명했는 데 남한 정부의 노력 끝에 2018년 1월 1일 북측은 평창올림픽에 참가 한다고 신년사가 나올 때 기쁨과 감사의 눈물를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신영순 사모의 노력으로 북한 장애인들이 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하여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는 북측 장애인 동계올림픽 참가자와 대표단 5명을 미리 북경으로 오게 하여 독일 후랑크후르트로 가서 1주일은 세계장애인올림픽 위원회가 주최하는 아지토스 캠프에 참가시키고 크로스 컨츄리 스키 코치를 받게 했다. 그리고 오베리드 월드컵 장애인 스키대회에 참가하게 되는 데 놀랍게도 마유철, 김정현 두 선수가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선수권을 기적같이 획득하게 되게 된다.

평창이 평화 올림픽이 된 이면에는 북한 장애인 선수들이 참석한 것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북한정부 고위층이 참가하게 되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자연스럽게 합류하여 화해의 무드가 조성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는 그동안 남모르는 세월을 킨슬러재단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경비를 주선하고 협력을 받은 결과 2018년 3월 육로로 북녘에 장애인 스키 대표단 21명과 함께 평창에 크로스컨츄리 스키대회에 마유철, 김정연 선수가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메달은 따지 못하였으나, 남과 북이 함께하여 민족 평화의 길을 여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긴슬러 재단의 남은 사역

긴슬러 재단은 그동안 가정적으로 장애를 갖은 자녀를 통하여 그리고 수년간 장애인들과 남한에서 사역해온 경험들을 이제는 북한의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로 연결이 되었는 데 이는 복지사역이면서 곧 통일사역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식량난으로 먹을 것을 지원하던 것에서 이제는 장애인의 사회적 자립을 위한 특수학교와 사회화를 위한 사역이 된 것이다.

이를 위한 미국교회와 남한 교회의 관심과 후원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그동안 2번의 재단을 조직했지만 실패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섭리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여전하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더 좋은 일꾼들을 연결해주시고 앞으로 만나기를 원하고 있다.

2005년 장애인체육회 회장이고, 비례대표 장애자인 평화민주당 장향숙 의원을 북측 대표단과 만남을 주선한 것을 계기로 2007년 부터 장애인들이 체육교류를 할 수있는 운동장비인 탁구대, 역기, 휠체어 마라톤, 기기들를 보냈다. 그리고 북한 장애인들의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악기와 필요한 도구들을 통일부의 기금을 받아서 지원을 하게 된다. 당시 장애인 목회자신 김종희 목사님이 리프트차량을 조선장애자연맹에 기증하여 모시고 2006년 일주일간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 좌측 미국 장로교 아시아 담당 임춘식 목사와 북한 장애인 관계자들과

북한에서의 킨슬러 재단의 위상

2019년 올해는 남북에 민족화해 와 평화를 이루는 첫 시작으로 인도주의 적이고 선교적 인 기초가 될 사업을 위해 민족이 평안히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평양장애인종합회복원’ 을 평화와 사랑의 집짓기를 위해 남북이 힘을 모아 건축을 완성 하도록 킨슬러재단 이 앞장서려고 합니다.

‘조선장애자보호련맹‘ 김문철 위원장은 신영순 선교사를 조선 장애자들의 어머니로 부르며 자기들과 끝까지 함께 가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아마, 하나님의 뜻이 남한에 교회들이 들어가 민족 화해와 사랑의 봉사로 평화적 협력의 길을 복음으로 완성 할 때 까지 킨슬러 가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하나님이 배푸신 은혜와 축복을 어렵고 힘든 이들과 나누고 함께 하는 것이 선교적 삶의 자세일 것이다. 이런 선한 사역을 통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길로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통일은 국가의 대표들이 만나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여진다.

지난 100년 킨슬러 가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 그리고 신영순 선교사가 한국(남북한)의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위하여 섬기고 돕는 사역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사무와 남편을 잇는 이 사역도 언젠가는 진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더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원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을 후원한 미국장로교회와 협력하는 한국의 장로교회로 하여금 이 일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 시에틀의 거주하는 남편 킨슬러 목사와 함께

권오덕(킨슬러) 목사의 약력 소개

1934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부모님과 갔다가 1948년 고등학교 2학년(16세) 한국으로 다시 내한 한다.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은 일본으로 피난을 가서 일본 동경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53~57년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 대학을 거쳐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958~60년까지 자원 봉사자로 경신,숭실,대광고등학교에서 영어, 성경교사를 지낸다.

1961년 프린스톤 신학교로 다시가 졸업을 하고 1962년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도 하고 1963~64년 평화봉사단 단장으로 한국에서 봉사한다. 그후 1972년 한국에 남장로교 선교사로 정식 부임하여 1976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다. 이후 부친의 뒤를 이어 성경구락부 이사장으로 22년, 등대복지회 이사장으로 6년간 재직하고 미국장로교 한국선교부 책임자로 사역하다가 2011년 6월 은퇴후 씨애틀에서 살고 있다.

권세열 목사와 권오덕 목사 부자는 가난하고 어려운 한국사회로 파송받아 선교사로 은퇴하기 까지 보여준 한국사랑은 곳곳에 남아 있다. 이들 부자는 고국인 미국보다 더 한국사람 처럼 한국사랑은 남다르다. 특히 킨슬러 재단의 출범은 늦은 감이 있지만 킨슬러가문의 한국 사랑의 결실이며 열매라는 것을 보게 된다.

예장뉴스 보도부 webmaster@pck-goo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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