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코로나19' 1년후 달라진 것

기사승인 2021.01.07  12:41:49

공유
default_news_ad1

                       '코로나19' 1년후 달라진 것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한지 1년이 되간다. 과거 인류가 직면했던 중세 페스트나 년전의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과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이다. 이에 대한 면역과 치료에 대한 의학적인 연구는 진전되고 있다. 또 국민위생을 위한 보건정책도 강화되었다. 이로 인한 기독교의 저항과 생전 처음으로 겪는 중소기업들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분야에 대하여 처방과 연구의 성과도 크다. 반면 지식인들이란 지금도 그렇고 시류에 따른 말 잔치들를 유행처럼 하고 있다. 나오는 얘기는 아는 척에 백날 그게 그 소리라는 비판이다. 사실 이러한 재앙은 천형이 아닌 인재라는 지적이다. 도시화와 인구 팽창, 소비 극대화로 인한 생산과잉을 촉발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라는 지적이다.

국가의 문제 기업의 문제는 당사자들이 있으니 생략하고 교회에 국한하여 생각해 본다면 누가 가장 큰 고통을 당했는 가가 관건이다. 중대형교회들도 어렵지만 나름 자체의 능력이나 준비로 이겨내고 있다. 문제는 임대교회와 중소 도시교회, 개척한지 얼마 안되는 교회들이다.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무분별하게 늘어난 사역지에 대하여 자체 관리가 안되니 구조적으로 가는 것 아닌 가 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탐욕과 소비주의 결과
인간과 자본위주의 지칠 줄 모르고 자기 증식과 탐욕이 불러온 전 지구적인 결과물이 이제는 인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되어 인간 활동을 강제로 멈추게 했다. 인구가 밀집된 중국이나 인도 같은 경우는 산업의 가동 중단으로 오히려 하늘이 맑아지고 공기는 좋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팬데믹이 우리인류에게 보내고 있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피조물의 애타는 탄식에 대한 외면이었다는 생각이다. 피조물의 세미한 고통의 음성을 듣는 영적 감수성을 잊어 버린 것이다. 개발과 발전을 숭상하고 그것에 익숙해진 편리함을 축복이라고 숭상해온 것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은 결과다. 욕망의 극대화를 축복이라는 메시지의 변화와 반란이 와야 한다. 특히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욕망의 충족예찬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19세기 위대한 선각자들인 미국의 데이빗 소로나 스콧트 니어링 부부의 삶이나 그 외 사회이론가들이 주장했던 덜 먹고 덜 소비하고 함께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인간의 욕구 충족 극대화와 무한한 자본축적을 위한 경제제도의 틀이 변화하지 않으면 다 같이 망하는 시간을 당길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소비와 공정무역이라는 가치를 주창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입해야 한다.
.
최초로 세금을 국민에게 되돌려준 정부
국가가 국민들에게 돈을 나줘줄 수 있을 만큼의 국부를 조상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만든 것이 우리나라다. 보편적 복지로의 국가지원과 기본소득과 중소 상공인에 대한 지원등도 유사이래 없는 일이다. 과거 IMF 시절 기업 채무에 대한 공적 자금 투입은 잔인하게도 실패한 탐욕에 자본가들을 살리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국가는 이제 대안에너지, 대안농업, 적정생산과 적정소비, 경쟁을 넘어선 상호부조를 도모하는 경제제도를 조성해야 한다.

지금 한두개 교회가 예배를 드리냐 못드리냐 하는 문제는 사실 지엽적이다. 그것은 현상이 완화되면 극복될 문제다. 그러나 존폐의 위기에 직면한 이들을 위하여 상회는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넉넉하고 맘좋은 몇 개의 대형교회가 도와주는 것도 귀하지만 노회나 총회가 어려운 이들을 향해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모여야 힘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일 수 없어도 하나님과 깊은 내면의 소통을 하는 훈련이 얼마나 중한지를 알게 된 것은 큰 소산이다. 그간 발산하고 드러내는 것을 권장한 목회에서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개발해야 한다. 남의 말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신앙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 외 모이는 예배에서 가정예배나 영상예배등으로의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된 것도 큰 소득이다.

   
 

생계형 목회 얼마나 더 해야 하나?
그동안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이면에는 ‘나 벌어 나 먹기식’의 개척교회가 대안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구절벽과 시대의 변화는 과거와 같은 작은 교회나 가족형 목회에 만족하지 않고 대형화에 쏠림현상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총회나 지도자들은 이를 예측하지 않고 방치해온 감이 있다.

개척교회의 신화는 설립자의 영웅담으로 포장되고 여기에 신앙과 신학이 덧입혀져 '너는 왜 안되는지' 비숫한 처지의 동역자들을 대상화시켰다. 개척에서 성장이 안되는 이유는 너무 많은 교회 숫자와 민낯이 드러난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이제 특수한 조건속에서 탄생한 성공신화는 종언을 고한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성장론이 아닌 진짜 섬기는 목회로 꾸준히 노력하여 최소한의 자립화화을 이루고 자생하는 교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으나 연고지나 특수한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틈새시장이 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갈 곳이 없어 개인적인 결단으로 무조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제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역사상 목사 가정의 생존을 위하여 그 개인이 마련한 교회에서 예배받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으로 전락시킨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개척도 포화상태인데 무한정 목사를 배출하는 교단이나 무한대의 개척교회을 허락하는 노회는 이제 수습을 조절하고 방식을 바꿔야 한다. 신학교도 미래와 사역이 불투명한 현실을 직시하고 더 이상 학생들과 부모들의 주머니에 의존하는 교육을 중지해야한다. 나아가 신학교 교수들은 뜬 구름 잡는 얘기와 이론 중심의 서구신학과 학자들이나 연구하는 식의 사변적 가르침을 중단하고 실제적으로 현장에서 요구되는 과목과 학제로 변화해야 한다.

   
 

선교지도 예외 아니다.
그동안 보내는 선교로 숫자와 전시행정과 개종 전도,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선교정책은 개정되어야 한다. 발상을 전환하여 이제는 비거주 선교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본다. 선교사 한 가정이 해외에 정주하면서 드는 행정부담과 비자와 생활을 위한 부대비용으로 들어가는 비용 대비 비교를 해봐야 한다.

적어도 시니어(10년이상)가 되면 현지 사역을 평가하고 현지 교회와 동역자들과의 협력하여 사역 이양준비를 해야 한다. 선교사들도 항시 상주하고 관리하고 나눠주는 방식에서 현지인에게 대폭 양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본국에서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여 사역할 수 있는지도 검토해야 한다. 거주비용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 것 인지도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 선교정책도 개인 선교사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서 다변화하여 질병과 가난 교육을 위한 교육과 복지 인프라를 만드는 시스템으로 변화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SNS의 발달과 재정관리의 투명화로 회의와 송금 공유방등으로 얼마든지 원격적으로 선교사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이고 선교세스템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제 선교지와 사역은 시작부터 서서히 현지 사역자들에게 이양을 위한 프로세스를 해야 한다.

더이상 선교사 개인의 사역충족과 상품을 위하여 일을 벌리고 건물을 세우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현지 선교사들의 협력과 나눔, 동역이 전제되지 않은 선교는 과거를 답습할 뿐이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열렸던 WCC 창립회의에 참가한 한 인도 목사는 서구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더 이상 돈이나 교파신학의 교리전수가 아닌 진정으로 이 땅과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갖은 친구들을 원했던 것이다.

더 이상 돈이나 물질로 교파교회를 전수하는 선교사 아니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 현지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사역의 성과와 자산을 처음부터 이양할 준비를 하는 선교이어야 한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정복과 지배라는 관점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 삶의 변화와 역사의 진보를 포함하는 전인적 구원이어야 할 것이다.

   
 

결론
한때 선교사로 파송을 받기 위해서 훈련을 받으면서 크게 느낀 것은 두가지다. 하나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으로 가서 겪을 일에 대한 사명감 키우기였다. 처음으로 국가와 교단을 대표한다는 자긍심이 컸다. 이로 인한 한 지도자로써의 태도와 자세. 그리고 헌신으로 성별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희생할 수 있다는 결단이 섰다. 게을러 질 때 훈련소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같은 의미다.

둘째는 MBTI나 직무능력 검사 결과였다.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측정해본 것인데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형식이라도 주관과 감정으로 살아온 삶에서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생각을 하도록 훈련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판단이나 말에 대하여 상대를 의식하고 나를 돌아보고 이를 평가하고 다시보는 사고의 훈련이었다.   

최근 가깝게 지내는 이들이 선교지에 귀가하기 위하여 시간적으로 재정적인 부감에도 불구하고 준비중이다. 건강의 염려를 뒤로 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도전을 하고 있다. 실제로 갈 수 있을지도 아직 불투명 하단다. 그래도 선교지에 복귀하려는 열정과 사명감을 고취시켜 준 곳은 바로 교단 선교부다. 더 이상 고국에서 나혼자 편히 보낼 수 만은 없다는 그 사명감과 숭고함에 박수를 보내며 현지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역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그런 노력들을 후원교회나 후원자들이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선교지에 복귀하려는 이들의 결단과 노력 그 자체는 나름 평가를 해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지에서 선교사를 기다리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본다. 선교지에 복귀하지 못하는 이들의 탄식과 눈물의 양식과 한숨이 크다. 어떤 위험을 만날지도 모르면서도 선교지로 가려는 동역자들에게 주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한다.

예장뉴스 보도부 webmaster@pck-goodnews.com

<저작권자 © 예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setImage2

최신기사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