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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익목사 평전 출간

기사승인 2024.05.30  23: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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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익목사 평전 출간의 역사적 의미(박성배목사)

집필 정균오목사(PCK 러시아 선교사 목사, 장신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2024년 5월 28일 오후 4시쯤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의 5대 담임목사였던 김동익목사 평전인 [온화한 미소의 사람 김동익]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러시아 선교사인 정균오박사의 3년여의 노력콰 수고를 통해서 완성된 평전이다. 

정균오박사는 자신을 러시아에 선교사로 보낸 영적 멘토 김동익목사님에 대한 평전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아내 연성숙선교사는 원고 수정을 아홉번이나 하였다. 출판사 렛츠북에서도 5교, 6교까지 하였다. 나는 김동익평전의 처음 밑그림인 목차 설계도를 [한국교회의 아버지 사무엘 마펫, 박성배 강석진지음, 2021.1.7, 킹덤북스]에 맞추어 만들었다.

김동익목사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되게 설계도를 만들었다. 혼신의 정성으로 역작(易作) [온화한 미소의 사람 김동익목사]을 출간하신 정균오선교사님과 연성숙선교사님께 큰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기록된 [온화한 미소의 사람 김동익]은 새문안교회 역사와 한국교회 역사속에서 평가가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김동익목사님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기록이다. 나는 1992년 9월 27일 새문안교회 100주년 기념 생일 날 김동익목사님 주례로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번에 김동익목사님 평전을 쓴 정균오박사는 결코 쉽지않은 작업을 해냈다. 320여 페이지에 달하는 김동익 평전은 앞으로 한국교회와 새문안교회 역사속에서 길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기록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

나는 2021년 1월 7일에 깅석진작가와 함께 쓴 [한국교회의 아버지 사무엘 마펫]을 쓴 후에 최고의 한국교회사가 민경배박사로 부터 "역사에 남을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 정균오박사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크게 기대가 된다. 정균오박사는 또 러시아 선교 30년을 [미션 콘비벤츠, 2024년 6월 4일 출간 예정]로 썼다. "미션 콘비벤츠"역시 380정도 분량의 완성도 높은 대작(大作)이다. 정성을 다한 책이다.

정균오박사는 이번에 쓴 두 권의 책을 시작으로 한국교회에 역사가 될 만한 좋은 책을 많이 써 낼 것으로 기대가 되는 작가이다. 두 권의 책은 극동방송[박성배목사의 책쓰기 코칭]과 PCK선교사훈련원(원장 정균오)에서 2024년 6윌 5일 강의를 하면서 소개하려고 한다. 정균오선교사님이 이번에 역사를 쓰는 큰 일을 해냈다. 2023년 제2회 PCK 유라시아 선교대회 후의 결실인 [유라시아 선교 꽃피다, 12인 공저]와 [서부 경남 목회 꽃피다]도 출간을 준비 중이다. 기록은 역사가 된다. 

고 김동익목사 약력 

고 김동익목사는 연세대학교와 장신대를 나오고 미국 피츠버그대학과 벤터빌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포항제일교회에서 목회한다. 이후 강신명목사 후임으로 새문안교회에 1981에 부임한다. 시무중 사모와 사별을 하게 되여 어린시절 함께 자란 황산성변호사와의 재혼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98년 별세했다. 

새문안교회의 5대 담임목사로 시무중에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조준형 목사를 태국 선교사로 파송하고 새진도교회 새온교회 등 교회개척이 이어졌다. 새문안교회 문헌사료집 발간, 여성 세미나 개최 등과 함께 선교선인 '새문안 방주호'를 건조, 기증하기도 하였다.

또 이화여대 강당에서 창립 100주년 기념 음악회로 멘델스존의 '사도바울'을 공연하였고, 창립 102주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헨델의 '엘리야'를 공연했다. 1998년에는 언더우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대형 교회를 제외하고는 음악을 전공한 지휘자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제대로 된 교회음악을 교육하여 한국 교회의 예배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음악교육원'을 개원했다.

김동익 목사 사후

3남 2녀를 자녀로 둔 황산성 사모는 김동익(金東益) 목사의 1주기를 맞아 새문안교회의 교우들은 합동예배와 함께 추모사업을 벌이자고 제안하지만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로는 우선 이후 부임한 이수영목사의 목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 바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 교회 차원의 추모행사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그 말대로 실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80년대 후반부터 발간해온 김목사의 설교집은 1주기를 맞아 마지막으로 펴내기로 했다. 제10권이 될 이 책의 가제는 `빛나는 얼굴'로 50여편의 설교문이 수록되었다. 남편에 대하여 설교를 삶의 전부로 알았고 설교를 준비하다가 숨진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김목사의 추모사업으로 제1회 전국신학생 설교대회를 개최한다. 

이에 대하여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르기를 "고인이 새문안교회에 드리웠던 그늘은 너무 크지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더욱 교우들께 추모행사를 하지 말도록 간청했습니다. 모세가 `나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했던 것도 유대민족이 자신의 뒤를 이을 지도자 여호수아를 따르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지요. 저도 혹시 누를 끼치게 될까봐 일절 교회의 직책을 맡지 않고 있고 성가대마저도 탈퇴했습니다."

그러나 황변호사의 김목사에 대한 마음은 간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후문이다. 김목사의 소천(召天) 이후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당시도 매주 한차례씩 고양시 벽제의 묘소를 방문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밉다는 생각에 속으로 험한 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그리움이 밀려오더라구요. 사실 너무나 성품이 착하고 저한테도 잘해주었거든요. 그걸 믿고 제가 함부로 대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고 유일한 나들이라고 할 영화구경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변호사이기도 한 황사모 역시 목사의 딸로 목사의 아들인 김목사와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과 차남이 선친의 뒤를 잇기 위해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황산성변호사의 약력 

1944년 11월 13일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신풍리에서 목사였던 아버지 황성욱의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순천 매산여자중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당시 같은 학번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79년 초까지 판사로 근무하다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같은 해 한국여성법률연구소 회장을 지냈다.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 아이들은 커가는데 판사 월급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변호사 개업했다고 방송에서 밝힌 바 있다.

1981년 민주한국당 인권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3년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와 결혼하였다. 1985년부터 변호사로 복귀하였다.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 양을 변호하는 변호인단에 속하였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MBC 생방송 여론광장의 진행을 담당하였다. 이 당시 왕성한 인권변호사 활동과 방송 활동으로 1993년 대한민국 인기스타 38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93년 초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환경처 장관에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까지 역임하였으며,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 분리수거의 기틀을 마련하고 입안하였다. 장관 재임 중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 출석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답변하여 물의를 빚었다. 장관 임명 당시에는 자신은 서울특별시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환경처 장관이 됐다고 하는 등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으나 2.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로 낙선했다. 당시 낙선후 주변에서 모두 지지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하여 정치에 대해서 아직 문외한이라는 말이 나왔다. 

1994년 존속 살해범인 박한상 사건의 변호인을 자처했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원래는 갱생을 목표로 변호를 시작했으나 반성의 기미가 없어 포기했다고. 훗날 이은석 사건의 변호인을 맡게 된다.

2000년 자유민주연합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전국구 국회의원 제8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또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기독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이후 정치는 접고 이혼 전문 변호사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릴 때 부친과 친구셨던 분의 아들로 함께 자란적이 있는 김동익목사와 재혼을 하여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그후 남편의 죽음이 새문안교회의 오랜 전통인 당회 떄문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하여 교회와는 좋은 관계가 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장뉴스 보도부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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