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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훈 목사 남대문교회에서 주일예배 드려

기사승인 2019.03.04  14: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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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훈 목사 남대문교회에서 주일예배 드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어서 돌아오오’,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등 한인 작곡자로는 가장 많은 곡을 우리 찬송가에 올린 박재훈(97, 토론토큰빛장로교회 원로) 목사가 3일 남대문교회(서울노회, 손윤탁 목사)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에 한국인 작곡가의 곡 선정은 그 심사와 절차가 매우 까다로워 쉽징 않은 데 박 목사의 곡은 한국교회사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 박재훈(토론토 큰빛장로교회 원로) 목사가 남대문교회에서 주일예배 드리고 있다

박 목사의 한국 방문은 3.1 100주년 기념으로 작곡한 오페라 “함성 1919”의 공연 참관을 위해서다. 그리고 남대문교회를 방문한 것은 그의 옛 친구 맹의순과의 약속 때문이라고 한다. 맹의순은 제 103회기 총회에서 순직자로 지정되었고 지난 2월 10일 순직자 지정 감사예배를 드렸다.( ‘포로들의 성자’ 맹의순, 순직자 추서 http://www.pck-goo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25 )

   
                              * 제자 조유택 목사와 박재훈 목사, 대광고 제자들과의 만남 
순직자 맹의순과 교제있어

박재훈 목사는 1926년생인 맹의순 보다 4살 위였지만 찬양으로 깊은 교제가 있었다. 박 목사가 이번에 남대문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기 전에 그가 음악교사로 지도했던 조유택(남대문교회 원로)목사 등 남대문교회에 출석하는 대광중학교 출신 성도들을 만난 자리에서이런 회고를 하였다.

당시 “조선신학교에 다니던 맹의순은 당시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중등부 교사를 했고 나는 대광중학교 음악교사를 지내며 교회에서 지휘자로 봉사했었다” 면서 “맹선생과 나는 신설동에 있던 내 자취방에서 자주 만나 신앙 안에서 교제하고 늘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일 아침이면 당시 남대문교회와 함께 있던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해 ‘병원 찬양’을 한 것도 우리 둘이 중심이 되었다.” 며 “지금 돌이켜봐도 맹의순은 아름다운 테너였고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인지 정확한 음정과 박자 등 매우 좋은 음악성을 갖고 있었다. 음악가로서의 소질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70년 전, 1949년 어느 날 맹의순은 자작시를 나에게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했다. 마치 애국자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시였다. 그러마하고 그 시를 주머니에 넣었는데... 6·25전쟁 중 이 시를 적은 메모지를 분실하고 말았다. 맹의순이 누런 메모지에 써서 전해준 그 시의 구절이 맴돌았다. 맹의순이 1952년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나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그 시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유언과도 같은 부탁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일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나선 한 동안 그 사실을 잊고 지냈었다.”며 노 목회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2017년 8월 맹의순의 육필일기인 “십자가의 길”(홍성사 간) 책을 받고 그 책에 수록 된 시 거룩한 꽃을 보고 오랜 미안함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했다.

   
                *  박재훈 목사에게 맹의순 선생 유품과 설명하는 박윤진 장로와 당회원들
박재훈 목사는 남대문교회 사료실에서 맹의순 선생의 육필일기 원본과 그의 유품을 보며 특히 추모예배 순서지를 보여주자 이 추모예배 순서지는 본인이 직접 쓴 것이라고 회상했다. 중등부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남대문교회 축구부원 들이라 말하며 70년 전 청년의 대로 돌아간 것 같다고 했다.

박목사는 주일예배를 마치며 “하나님의 은혜로 남대문교회 성도들 가정마다 감사와 찬양이 샘물같이 흘러나게 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부어져서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주님의 피로 세우신 이 교회가 이 땅의 등불 되고 새로운 빛이 되어 어두움 가운데 헤매는 우리 민족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교회로 굳게 서기”를 축복했다.

담임인 손윤탁 목사는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과 사랑에 힘입어 오늘을 사는 것임을 깨닫고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여야 하겠다”고 화답했다.

   
 
남대문 교회 역사

남대문교회는 4대문중 하나인 남대문 앞에 건립된 교회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에 부설된 제중원교회가 그 전신이었다. 제중원교회는 당시 한국의 형편상 교회라는 조직체로써는 등록된 처소는 아니지만 선교사 알렌(Allen, H. N., 安連) 및 헤론(Heron, J. W., 惠論) 부부와 의사 스크랜턴(Scranton, W. B.)의 어머니 등에 의하여 1885년 6월 28일 최초의 공식 주일예배를 가졌으며, 노춘경·서경조·최병오·정공빈이 세례를 받는 등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남대문 교회 100년사에서는 이 예배처가 한국 최초의 예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제미 교회사 학자 옥성득 교수는 이것을 한국 최초의 예배처로 보는 데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현재와 같이 총회나 노회와 같은 기관으로부터 인준받은 기관이냐? 는 식의 사고로 보인다. 그렇게 말한다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내한 선교사들이 최로로 예배를 드렸던 것은 사실이고 이후 교회로 정식 등록을 한 것으로 보인다.

   
                   * 한국전쟁과정에서 교회는 완파되었고 수복후 천막교회를 찍은 라이프기자 
연원 및 변천

처음에는 구리개[銅峴: 지금의 을지로1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04년 9월 제중원이 남대문밖 복숭아골(지금의 중구 양동)로 이전 하게 되는 데 이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당시 4대문 안과 밖은 사람들의 지위나 사는 처지는 천양지차였다 문들은 저녁이면 닫았고 아침이면 열어 아무나 출입이 불가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문안팎으로 드나드는 이들로 문정성시를 이뤘고 자연힌 객주가 서고 사람들이 모여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의료인들과 선교사들 가족으로 시작돤 예배모임에서 제중원의 한인 직원으로 확대가 되고 조선인들의 교회로 점차 변화를 해간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지역 교회로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이 그러했듯이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살고 있는 곳에 세워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요즘 말로 치면 마음목회의 원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해서 제중원에서 이름도 남대문밖 혹은 남문밖교회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첫 목회자로는 미국 북장로회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가 관리를 맡았으며, 병원책임자였던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이 지원하였다. 1910년 12월에는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기부금으로 새로운 교회당을 준공하였고, 1912년에는 초대 담임목사로 박정찬(朴禎燦)이 부임하였다.

   
                          * 힐튼 호탤 주차장에서 바라본 남대문교회와 교육관(알렌기념관)
선교사들 교회에서 한인교회로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한 집사였던 이갑성(李甲成), 조사(助師)였던 함태영(咸台永) 등은 3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특히 이갑성은 청년대표로 33인에 참가하였다. 1924년 12월, 제3대 목사로 취임한 김익두(金益斗)는 유명한 부흥설교가로서 교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이단시비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또한 1934년에 취임한 김영주(金英珠)는 ‘창세기 모세 저작설 부인사건’을 일으켜 총회에서 이단여부를 조사받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와 조선혁신교단의 설립으로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하자, 혁신교단의 의장인 전필순(全弼淳)의 제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다.

1944년에는 김치선(金致善)이 제6대 목사로 부임하여 1953년까지 시무하면서 ‘삼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현 대한신학교의 전신인 야간신학원도 설립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수복 후 재건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당시 집사이던 박태선(朴泰善)의 신앙노선에 문제가 제기되어 이단시비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박대선은 신앙촌 운동으로 유명한 한국의 토속이단으로 가장 크게 번성하여 천부교라는 교단으로 덕소등에 공동체를 만들고 신앙촌이라는 생활용품 사업으로 담요와 식자재등으로 교인들을 헌금만 내게하는 수동적인 종교생활이 아닌 생활조합으로 발전시킨 사례로 꼽힌다.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이 되었지만 한 때 전국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이후 부산 기장으로 이전하여 최근에도 여성 속옷이나 기능성 음료등을 생산하고 있고 각 지역마다 지점형 신앙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54년 9월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한인교회활동을 벌이던 김태묵(金泰默)이 부임하여 교회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고, 1957년부터 1979년까지는 배명준(裵明俊)이 제8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후 김태묵, 김규병, 임영수, 조유택 목사등이 시무했고 2013년 손윤탁 목사가 부임하여 현재 까지 13명의 한국인 목사들이 부임을 한다. 

남대문교회의 현 자리는 호탤 힐튼과 맞다아 있고 석조로 잘 지어진 건물이다. 그리고 현재 지역에는 오피스로 둘러쌓여 있지만 남대문 교회출신 교우들이 모이는 공동체다. 이 교회가 과거에는 공덕(孔德), 행화정(杏花亭)·삼판통·청량리중앙교회·해방촌교회등을  세웠으며, 춘천 서상교회, 사농동, 옥산포교회를 안성의 공도교회, 부여 진호리 흑석동교회, 최근에는 맹인교회인 애능중앙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1979년에는 교회의 역사를 정리한 『남대문교회사』를 편찬하였고, 1987년에는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남대문교회 건물은 고딕양식의 석조 건축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높음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기독교대연감』(기독교대연감편찬위원회, 기독교문사, 1993)
『남대문교회사』(남대문교회, 1979)

편집위원 oikos78@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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