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이맹영목사 40년 만에 고교 졸업장 받아

기사승인 2023.05.16  09:18:13

공유
default_news_ad1

            우리교단 이맹영목사 광주제일고등학교서 명예졸업증 받아   

전남일보 강주비 기자 jubi.kang@jnilbo.com rhrhk

편집자 글/ 이맹영목사는 1962년생으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교 2년생으로 시위에 참가해 퇴학처분을 받는 다. 광주일고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전남지역의 명문고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학생시절 이런 아픔을 당한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방황의 세월을 보다가 모태신앙인 그는 회심하여 서울교회에 정착해 고 이종윤목사의 신앙적 지도아래 35세에 장신대 학부 95학번으로 입학하여 서울장신대 신대원을 마치고 목사가 된다.

그후 일산 두레교회를 개척한 김회권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서울역 노숙 사역을 하였다. 가평장로교회 부목사를 거쳐 서울역 "민족사랑교회"와 "서울역거리교회" 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후 작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양선교회를 후암동에 개척하였다. 지금은 후암동에 살면서 조현병 환자들과 용산 택배 노동자들과 교류 하면서 사역중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내 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상지인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탑과 기념 역사관이 조성돼 있다. 학생들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기념탑을 통해 자연스레 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선배들을 기리고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반면 5·18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선배들의 이야기는 후배들에게 생소하다. 이는 교내에 관련 기념 공간이 없는 것과 무관치 않다. 고등학생이었지만 국가 폭력에 맞서 당당히 싸웠던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15일 찾은 광주일고. 학교 정문과 운동장 사이에 위치한 학생독립운동기념탑 주변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학생들은 그곳을 거닐거나, 나무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몇몇은 기념탑 앞에 멈춰 탑에 새겨진 문구와 그림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광주 지역 학생들이 주도해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이다.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 강점기 3대 민족운동 중 하나로 꼽힌다. 100여 년 전의 길고 무거운 역사지만, 학생들은 이를 어렵게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학교 차원의 계기교육 및 추모 행사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일고 1학년 나하윤(16)군은 “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잘 몰랐는데, 입학할 때 반별로 직접 기념탑을 찾아 참배하고 교장선생님이 이 탑이 어떤 탑인지 자세히 설명해 줬다”며 “점심시간이나 등하굣길에 기념탑을 보며 그때 배운 학교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실제 광주일고는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교내 기념탑을 찾아 참배하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학생독립운동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는 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또 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된 11월에는 전교생들이 기념탑을 찾아 열사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다. 기념 역사관도 교내에 설립돼 있어 활용성·접근성이 높다. 

   
                              * KBS 5.18 다큐를 함께 찍었던 5.18 여성 스피커였던 차명숙여사

그러나 광주일고 선배들이 적극 참여했던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광주일고에는 5·18민주화운동 시위에 나섰다가 강제 퇴학당한 이맹영씨를 비롯해 김용관씨, 오춘환씨, 이홍재씨, 정움동씨, 탁상준씨 등 5명의 동문이 5·18 관련자(사망·부상·구속)로 파악된다. 

가두방송을 하다 퇴학당한 이씨의 경우 지난 2020년 명예졸업장을 받아 교지에 인터뷰가 크게 실리면서 잠깐 화제가 되긴 했다. 이씨는 광주일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시위대 차량에 올라 시내 전역을 누비며 가두방송을 했다. 이후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3학년에 진학하지 못한 채 강제 퇴학당했다.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씨는 광주일고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이 소식을 실은 광주일고 교지에는 ‘기억해야 할 선배님, 이맹영 동문’ 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혔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3학년 최승우(18)군은 “현재 3학년들은 입학 당시 선배(이씨)가 명예졸업장을 받았다는 소식이 실린 교지를 받아서 (이씨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래 학년들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신 선배가 있다’ 정도만 알거나 아예 모를 것이다”고 말했다.   

교직원들도 학생독립운동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학교의 온도 차에 공감하는 모양새다. 광주일고 관계자는 “워낙 많은 교육활동이 있기에 5·18 주간 교육만으로는 학생들이 크게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체감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외부 활동이 어려운 학교 특성상 교내에 기념 시설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학생들이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는데) 분명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광주일고 명예졸업자 이씨는 후배들이 선배의 ‘오월정신’을 계승해 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이씨는 “학생들이 진실을 바로 알고 자유를 외치며 투쟁했던 당시 선배들과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당시 시위에 참여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많다. 교내에 작은 기념 시설 등이 마련된다면 이들을 알리고, (학생들에게) 오월정신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 광주 5.18 기록관에서 당시 상황을 발표하는 이맹영목사(맨좌측)

      이맹영(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2020.11.3 광주 518기록관에서 발표 

1. 당시의 상황과 참여하게 된 동기

1980년 5월은 1979년 10월 독재에 항거한 부마항쟁에 이어, 같은 달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대한민국 정세가 매우 불안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는 박정희 유고 이후 전두환이 서울의 봄을 꿈꾸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과 민주인사들을 가택연금과 수감 등으로 탄압하였고, 이후 이들은 무력으로 12ᆞ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육군참모 총장 정승화 등을 연행하면서 국가반란을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력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던 신군부의 총칼이 1980년 5월 17일을 전후로 청운의 꿈을 안고 정진하고 있던 모교의 정문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당시 재학생들은 대동고, 중앙여고 등 동료학생들이 무자비하게 살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업을 거부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상과 의자를 교실 뒤로 밀친 후 학생들의 분노는 뜨겁게 폭발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당시 교장이셨던 이대로 선생님은 매우 흥분된 어조로 안절부절 하였습니다. 우리를 지켜야 할 총칼이 우리를 향함으로 그 의분은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할 무력은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들의 살기 띈 눈초리와 대검과 총이 금방이라도 학교로 들어설 것 같은 그 모습이… 살기가 등등한 이러한 위협 속에서 5월 17일 모든 학생들은 다음날인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의를 하였습니다. 당시 들리는 소식으로는 광주지역의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의가 끝나자마자 당일인 5월 17일 갑자기 휴교령이 내려져 바로 귀가 조치를 당하였습니다. 귀가할 당시 정문에는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양동시장 방향의 후문으로 도망치듯이 귀가를 하였습니다. 저는 살기가 등등한 계엄군의 모습을 학교에서부터 목격하고 그들의 살인행위의 비보에 못 이겨 다음날 금남로 광장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살상행위를 구체적으로 목도한 후 적극적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무자비하게 살상된 시민군의 시체를 상무관에서 목격한 이후로 생명을 내어놓고 시민군에 적극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2. 가두방송 스피커가 된 계기

제가 시민독려 가두방송 스피커가 된 계기는 광주청년회의소 유니폼을 입은 분이 저의 출신학교를 확인한 후 권하여서 하게 되었습니다. 첫날엔 전남여고생과 함께하다가 그 후론 혼자 했습니다.
그 증거는 당시 수많은 친구들의 목격과 교내 경찰연행과 경찰조사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가 선두지휘차량에서 시민들을 독려하는 방송을 할 때 기분은 만감이 교차합니다. 차량이 위험지역을 벗어나 서행(徐行)하면서 산수오거리를 지나 광주교육대학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그때 무리지어 연도에 선 시민들의 모습은 광복을 맞아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던 모습과 그 동기는 다르지만 하나 된 마음은 같았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뜨거운 눈망울과 우레와 같은 박수로 격려를 보낼 때, 그들에게 저의 독려방송은 무의미했고 오히려 제가 뜨거운 독려를 받았습니다. 이는 공의와 정의라는 화두가 서로의 마음에 통하여 온전히 진실 된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以心傳心, 心心相印). 한편 스피커 선두차량은 가장 앞장서서 광주시내 전역을 순회했기 때문에 수차례 총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차하지 않고 내 몫을 사수한 이유를 5‧ᆞ18이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사망의 길을 떠나지 않고 투쟁의 길로 지속하게 했는지? 그것은 오직 오월의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붉은 광주의 피였습니다.

3. 5ᆞ18 투쟁담과 에피소드

5‧18항쟁 기간 기억나는 투쟁담과 에피소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광주광역시 북구 양산동에 위치한 전매청 무기고에서 칼빈총을 탈취했던 이야기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20일 전후쯤 된 것 같습니다. 당시 광주역을 시작으로 처처에서 시민들의 희생이 발생하자, 그 상황을 목격한 저희들도 계엄군의 무력(武力)에 무력감(無力感)을 느끼고 전매청 무기고를 탈취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때 광주상고에 재학 중이었던 친구 김삼락을 비롯한 12명쯤이 함께했습니다. 우리가 전매청 정문에 이르렀을 때, 수위실 앞에 서너 명의 전매청 직원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이분들에게 무기고 안내를 부탁하자, 이분들은 수위실 앞에 어른 키만큼 쌓인 담배를 가리키며 이 담배만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총이었기 때문에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 바로 무기고로 향하였습니다. 무기고에 이르자 동료가 가지고 있었던 쇠파이프로 자물쇠 장치를 부수고 칼빈총을 신속하게 차량에 운반하였습니다. 운반 후 무기고 내부에 있는 탄알 창고문을 부수려는 순간 계엄군이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차량에 승차하였습니다. 그때 계엄군과 부딪혔다면 우리 모두는 무참히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저희들은 유동삼거리에서 총을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5ᆞ18민주화운동이 무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묻습니다. 독일의 성직자 본 훼퍼는 히틀러의 무자비한 유태인 학살을 목격한 후 히틀러 제거 암살단에 가담합니다. 본 훼퍼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히틀러 암살단은 두 차례에 걸쳐 무력을 사용하여 거사를 행하였습니다. 이 거사로 인해 본 훼퍼는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당합니다. 이러한 본 훼퍼를 세계인들은 민주인사라는 칭호를 뛰어넘어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이에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반론을 제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광주시민군들의 의로운 행위와 본 훼퍼의 의로운 행위는 본질상 동일하기 때문에 세계인들은 내용상 분별은 하나, 분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만원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무기고를 탈취한 행위는 북한특수군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의 주장이 허위라는 것은 제가 서술한 객관적인 사실이 여실히 증거합니다.

두 번째는 ‘연‧고대생 해방작전’입니다. 이 일은 5ᆞ18항쟁기간 후반부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시초는 연‧고대생 수백 명이 광주에 오다가 담양에서 못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작된 일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저희들은 자율적으로 ‘연‧고대생 해방작전’에 참여할 대원 20여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선발된 대원들은 완전무장을 한 후 두 대의 신형 군용트럭을 타고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두 대의 차량이 담양읍을 향하여 가던 중, 전 대원이 몰살당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호남고속도로 담양인터체인지를 지난 후 갑자기 차량 위로 총알이 빗발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순간적으로 보니, 평지와 산지의 중간에 위치한 구릉지에서 수십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선자세로 차량을 집중사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차량 밑바닥으로 죽은 개처럼 바짝 엎드렸습니다. 이러한 순간에도 한 사람은 엎드리지 않고 차량 후미에서 소지한 칼빈총으로 공수부대원을 향하여 사격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를 지나 긴박한 위기를 넘기자 대책을 세우고자 차량을 세웠습니다. 내려 보니, 대원 중 한 사람이 흉부에 총을 맞았습니다. 이분은 위기의 순간에도 사격을 했던 분이었습니다. 가슴에 맞은 흉탄 부위는 새끼손가락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아마도 M16 총알 파편에 흉상을 입었던 것 같습니다. 차량 몸체에도 총탄의 흔적이 많았습니다. 집중사격의 총알세례로 혼비백산(魂飛魄散)을 경험한 우리들은 진퇴양난의 입장에 처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먼발치에서 대형트럭이 채소를 가득 싣고 오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전신 전화, 교통, 언론 등이 통제된 상태여서 의외였습니다. 그 차량을 세우고 기사에게 영문을 물으니 당시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차량은 영남차량이었고, 기사도 영남사람이었습니다. 순간 대원 중 몇 사람은 5‧18의 살상이 영남군인들이 자행한 일로 알고 복수를 감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원들의 만류로 바로 멈추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판단도 못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 동일한 대형트럭이 채소를 싣고 오고 있었습니다. 세워보니, 운행자는 호남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대책이 세워졌습니다. 대책은 영남차량과 호남차량을 시민군 군인차량 앞뒤로 에스코트하여 다시 광주로 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담양으로 진군하지 않고 다시 광주로 회귀하는 결정은 계엄군이 담양 외곽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습니다. 천만다행하게도 계엄군과 직면하지 않고 광주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광주시내에 이르자 총상 환자를 구(舊)광주종합공용시외터미널(대인동) 건너편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고속도로 총격사건에서 대원들이 몰살되지 않은 이유는 공수부대 군인들이 사격한 위치가 고속도로보다 높은 구릉지여서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량 운전수가 총에 맞았다면 저희들은 몰살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헬기사격과 관련해서는 제가 두 차례 목격을 하였습니다. 한 번은 도청 뒤 노동청 앞에서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시민군을 차에 태우러 가던 중 목격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계엄군들이 매우 긴장된 상황이어서 도청 뒤쪽을 함부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용 지프차 앞면에 십자가 병원 마크를 크게 달고 하얀 의사가운까지 입고 갔습니다. 차량이 상무관 방향을 지나 갈 때, 공중에서 총격을 가하여 두두두 하는 총격소리와 아스팔트가 파편 되는 것을 보고 후퇴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광주적십자병원에 부상자들을 싣고 가던 중 병원 앞 상공에서 광주천을 향하여 총격하는 상황을 목격하였습니다.

5ᆞ18과 관련된 마지막 에피소드는 저의 친구 한석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현재 그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알로하 프로듀스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는 5‧18때 제가 그 친구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권투선수였던 그는 5월 23일 25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평소 알고 지냈던 제일상전 홍금숙 등과 나주 방향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송암공단을 지나고 있는데, 버스기사가 광주고속버스가 논두렁 아래로 전복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고 예사롭지 않아 퇴로하는 순간 양쪽에서 무차별 사격이 가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를 돌려 백운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제가 지프차를 타고 광주 시민들을 열렬히 독려하는 모습을 보고 반가워서 저를 만나기 위해 그 버스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타고 있던 차량이 출발하여서 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그 친구는 생명을 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미니버스가 주남마을로 가다가 공수부대의 총격에 의해 18명 중 1명만 생존하고, 17명이 몰살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생존자가 그의 친구였던 홍금숙씨였고, 후에 그녀는 국회에서 주남마을사건 유일한 생존자로서 당시를 증언하였습니다.

4. 5ᆞ18 참여로 인한 고난과 잃어버린 꿈

5ᆞ18 참여후 저는 가담자들이 체포되는 소식을 들으면서 하루하루가 불안과 공포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중 교내에서 불시에 정보과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되어 협박과 폭력 속에서 10여일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내용은 참여하게 된 동기, 가두방송 내용, 무기탈취 과정과 숨겨 놓은 무기를 내놓으라는 협박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체포로 저희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으셔서, 아버님은 술로 연명하시다가 체포된 다음 해에 갑자기 소천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정신병원 치료를 받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셨습니다. 이후, 저는 저도 모르게 보안감찰대상자로 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부경찰서 대공과의 감시를 받게 되어 연로하신 부모님과 가정에 폐를 끼치는 문제아가 되었고, 학교에서는 대공과로부터 지시받은 금지명령을 지키느라 스스로 고립된 존재가 되어 인생의 쓴 맛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매일 아침 어두운 얼굴로 저희 집으로 출근하여 함께 등교하였고, 등교해선 동급생들이 넓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때, 저는 벤치에 앉아 고립된 외딴 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ᆞ18을 전후하여 저의 청춘은 명암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결국 군부의 종용으로 학생의 꿈의 터전이자 둥지인 학교로부터 퇴학이라는 비운의 철퇴를 맞아 청운의 꿈을 접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사회의 반항아가 되어 성난 황소처럼 방황을 하였습니다. 둥지를 잃어버린 한 마리 새처럼 인생의 풍파 속에서 귀중한 청춘을 잃어버리고 인생의 미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종교에 귀의하였지만 잃어버린 세월은 지금까지 고통으로 잔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의적인 동기로 5ᆞ18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굳이 5ᆞ18과 관련된 단체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떠난 영령들의 얼과 정신을 폄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산 자로서 영령들의 사자(Lion)같은 사자(使者)가 되기를 한 번도 주저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저의 활동을 목격한 여러 친구들과 지인들로부터 5‧18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의 의분으로 가담하였고, 앞서 간 수많은 영령들이 있기 때문에 과분한 칭송을 특별하게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5ᆞ18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함으로 신군부 군홧발에 짓밟힌 5월 꽃잎처럼 저의 젊음도 짓밟혔지만, 참여를 당연지사로 여겼기에 보상은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5ᆞ18 후유증으로 인한 인생의 손실은 지대했지만 어떠한 보상과 혜택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산화한 무명의 광주 혼이 저에게 보답이자 산 자로서 굳세게 살아야 할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5. 산 자로서 하고 싶은 말

기업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의 주인인 자본가도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노동의 생산자인 노동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현대정치의 생산자 역할은 5 ‧18민주화운동입니다. 이 정신을 계승한 운동이 광화문 촛불혁명입니다. 즉 금남로의 민주와 평화의 함성이 광화문 함성으로 연계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5 ‧18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수많은 증거와 증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40년 세월이 흐르도록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2017년도에 발견된 군 내부 문건은 그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이 문서는 1980년 5월 21일 보안사령부(광주505보안대)가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기밀문서입니다. 이 문서에는 '실탄장전 및 유사시 발포명령 하달, 1인당 20발'이라는 내용이 적시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명백한 문서와 하늘과 땅도 알고 있는 5‧18진상규명이 40년이 흐르도록 규명되지 않는 것은 산 자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서에서 40년은 준비의 끝이자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제 5‧18학살자와 5‧18왜곡의 진상을 밝히는 것만이 5‧18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하여 5‧18진상규명특별법이 속히 통과되어 그 가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진실이 밝혀지므로 역사는 전진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5‧18민주화운동과 이 정신을 계승한 촛불혁명의 현주소를 가늠하고 자문함으로 글을 맺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세월이 갈수록 이름만 있고 그 빛은 흐려지고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그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세월속에서 퇴색되어 가는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두 운동의 생산자인 시민의 자리가 광장에서 골목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관장하는 자리가 생산자의 자리인 광장에서 자본가적인 밀실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적인 밀실의 자리에서 시민의 자리인 광장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5‧18정신과 민주주의의 생산자인 저희들은 무엇을 하여야할까요?산자로서 사자가 될 수 있길 빕니다. 

   
 

 

예장뉴스 보도부 ds2sgt@daum.net

<저작권자 © 예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