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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일본 총리에 이시바 시게루

기사승인 2024.09.28  08: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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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아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제 47대 총리로 취임할 이시바 시게루(1957생)는 자민당  간사장을 2번이나 역임한 중년 정치인 이다. 관방장관등 여러 내각의 장관을 지내고 4전 5기의 도전으로 파 벌없이 총리가된 입지전적의 인물이라고 한다. 또 일본에선 드문 기독교인 가정출신으로 여러번 자신의 신앙과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4년간 이시바를 주목한 끝에 홍박사가 발견한 이시바의 진짜 모습은?(일본 홍이표박사) - YouTube

전례없는 한일관계의 냉각속에서 아베파벌의 자민당 정치구도에서 반아베 기치를 내걸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비판해온 정치인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서 공부하고 현지 목회도 하고 교수를 지낸 홍이표박사가 쓴 글을 소개한다. 홍목사는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일본기독교단 탄고미야즈 교회서 목회도 하고 야마나시현의 한 기독교대학 교원을 지냈다. 

   
 

         변방의 정치인에서 총리 대신이 되기 까지

포스트 아베는 어떻게 될까? 일본이나 한국 동아시아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줄곧 여론조사 1위로 대중적 기대를 모아온 인물이 있었는 데 아베의 정치로선을 잇는 이들에 비하면 나름 “교양”있고 “합리적.” 인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다. 그는 자민당 간사장을 2번이나 역임했으면서도 아베를 비판해 온 ‘정적’(政敵)이며, 한국이나 중국 등과 마찰을 빚어 온 역사 문제에 대해서 전향적 태도를 취하고 있어 극우 세력들로부터는 경계의 대상이다.

기본적으로 그도 군대를 보유한 ‘보통국가’ 회귀를 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 문제를 화끈하게 청산하고 이웃 국가들로부터 확실하게 인정받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실질적 우경화를 나아가기 위해 한 번은 제대로 뒤집어 써야 한다는 식의 입장이랄까. 아베의 정치적 노선을 잇는 일본의 주류정치판에서 파벌없이 총리가 된 이시바의 입성은 대단한 것이라는 평이다.

총리 대신 선거 예선에서 극우 여성 정치인 다카이치에 밀려 2위였던 이시바 시게루가 둘이 붙는 결선 투표에서 189 대 173표로 다카아키를 눌러 결국 새로운 일본 총리가 되었다. 이전에는 2위를 하고도 결선에서 낙마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이시바 지로가 참의원 의원, 돗토리현 지사 등을 지냈지만 “아버지처럼 되기는 어렵다”며 대학 졸업 뒤 은행원이 됐다. 하지만 부친 사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권유로  1986년 자민당 소속으로 당시 최연소인 29살 나이에 중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방위청(현재 방위성) 장관으로 처음 내각에 들어간 뒤, 안보 분야 등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 “(식민 지배가) 합법적이었다고 해도, 독립국이었던 한국을 합병하고 (그들의) 성을 바꾼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자민당 정치인 중에서는 전향적 인식을 드러내지만, 안보 정책 자체는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규정하는 헌법 개정을 하자고 주장하는 등 ‘매파’적이다. 내각에서는 농림수산상, 지방창생상을 거쳤다. 

해박한 지식과 함께 성실함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다. “연설과 토론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당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2008년, 2012년, 2018년, 2020년 네 차례 총재 선거에 도전해 모두 실패했다. 일반 유권자에게 인기가 높은 반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국회의원 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정치 초년병이던 1990년대 정치개혁을 주장하며 당을 탈당하는가 하면, 복당한 이후에도 당내 주류파에 쓴소리를 마다않으며 비주류의 길을 걸어왔다.

특히 지난 2020년 ‘당내 절대 권력’이던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서 코로나19 부실 대응 문제를 놓고 “이대로면 자민당이 끝장난다”고 대놓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 최초의 기독교인 총리는 아니지만 일본정가에서는 매우 드문 일로 역대 총리 중엔 오히라 마사요시(김종필과의 한일회담 메모로 유명)가 고교 시절에 사토 사다키치(佐藤定吉)의 영향과 아버지의 죽음, 자신의 질병 경험 등을 거치며 1929년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했던 기독교인이다.

   
 * 1883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 기독교도 대친목회 가운데 흰 옷이 성서 번역을 한 이수정이다. 이수정 주변으로 니지마 조, 우치무라 간조, 츠다 센, 마츠야마 다카요시 우에무라 마사히사 등 걸출한 인물들이 다 나와 있다. 맨 가운데 수염 긴 사람 바로 뒤가 가나모리 츠린,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의 외증조부이다. 가나모리 츠린 왼쪽에는 우에무라 마사히사

그 밖에도 개신교 침례교파 출신인 하토야마 이치로와 하토야마 유키오(이 둘은 각각 조부 - 손자 관계), 가톨릭 신자인 요시다 시게루와 아소 다로(이 둘은 각각 외조부 - 외손 관계), 그리고 패전 이전의 총리들까지 포함하면 기독교인이었던 일본 총리는 약 8명 정도 된다.  그 밖의 정치인 중에서는 사회민주당 당수를 지낸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가 목사의 딸로서 도시샤대학 법학부 출신이었으며, 목사로서 중의원을 역임하며 한일 기독연맹의원 회장을 지낸 도이 류이치(土肥 隆一) 의원이 있다.     

   
           * 2009년부터 강원도와 돗토리현서 시작된 동해-사카이미나토-블라디보스톡 정기 항로

일본의 갈릴리 땅, 돗토리가 배출한 첫 총리

변경(辺境)에서 움트는 한일 관계의 새 모델을 기대... 일본의 새 총리 이시바 시게루(石破茂)가 당선되자 일본의 돗토리현(鳥取県)이 떠들썩하다. 돗토리현 최초로 총리를 탄생시켰다는 호외를 받는 시민들이 줄을 잇는다. 산인(山陰)지역라 불리는 돗토리현과 시마네현 지역은 땅은 넓지만 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다. 2024년 현재 기준 현민 전체가 53만 명에 불과하다. 그 뒤를 시마네가 잇는다.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등을 자랑스러운 일본의 얼굴이라는 뜻에서 '오모테 니뽄(表日本)'이라 부르던 것에 비해 낙후되고 사람 없는, 심지어 미개하고 야만적인 반도와 대륙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우라니뽄(裏日本)'이란 차별어로 부르던 동해 인접 지역에서도 가장 낙후된 대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번 총리 배출은 지역민 입장에서는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이시바가 최종적으로 총재에 당선되자, 한 곳에 모인 현민들과 이시바 부인이 얼싸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기존의 총리 부인에 비해 서민적인 풍모이다.) 이것은 강원도나 제주도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는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기에 이시바 개인 40년 정치 인생의 결실을 현민 전체가 자기 일처럼 느끼는 것 같다.  

이시바가 새 총리가 되기 가장 어려운 점 하나는 그가 크리스찬이란 이유 일 것이라고 본 이들이 많다. 한국은 YS에 이어 MB까지 장로로 비토가 없지만 일본은 다르다. 우선 문화적으로 천황제라는 체제자체가 반기독교적이고 인구 0.5% 안팎에 불과한 기독교인의 비율은 소수종교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황속에서 기성 정치인이 기독교인이라고 공개하는 것은 모르나 총리까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마이너리티 집단에 속한 인물로 다수 일본인을 대표로 인정하기에는 무언가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전전 기독교는 군국주의에 협력했지만, 패전 이후 일본기독교단과 일본기독교회, 성공회 등 대부분 기독교 교파들이 참회 선언을 하고, 일본의 정치적 우경화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와 이시바의 크리스찬 정체성은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아베가 수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만주괴뢰국을 세운 고위 관료이자 A급 전범이었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이후 총리 역임)가 큰 후광 역할을 했시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시바의 외가는 어쩌면 그의 정치 인생에 발목을 잡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시바의 외증조부 가나모리 츠린(金森通倫, 1857-1945)은 도시샤대학의 창립자 니지마 조의 제자로서, 일본조합교회의 대표적인 초기 지도자로서 오카야마 및 돗토리 지역 전도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

현재의 일본기독교단 돗토리교회의 초기 개척과 1880년 설립 과정에도 가나모리가 관여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가나모리의 장손녀가 돗토리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이시바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지금의 이시바 전 간사장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의 깊은 신앙심을 보고 자란 이시바도 자연스럽게 고교 시절 돗토리교회에 세례를 받고 교회 회원이 된다. 이시바 시게루의 아버지도 돗토리 현지사, 참의원 등을 역임한 지역 정치인이라 그 후광을 입긴 했지만, 역시 일본 사회에서 크리스찬 코드라는 것은 마이너리티 이미지이므로 결정적 순간 배제의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주임목사로 일했던 탄고미야즈교회의 예배당을 1960년에 건축한 미야우치 목사님이란 분은 사임하고 바로 돗토리교회로 옮겨 가신 바 있다. 이후 1992년의 창립 100년 기념 행사 때 사진만 보아도 돗토리교회 교우들이 탄고미야즈교회에 찾아와 교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옛날에는 교통이 안 좋아 바다 쪽으로 더 친하게 지낸 듯 하다) 이 점은, 내가 이시바 시게루 씨를 조금 가깝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시바 씨의 친척들 중에는 도시샤대학 총장도 있고, 메이지학원대학 교수도 있는 등, 그가 자신의 가정적 배경을 부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가 역사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고 넘어가자고 주장하는 데는, 역사 문제를 철저히 반성하려 한 일본 기독교계의 풍토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어찌됐든, 그는 총리실 문턱까지는 갈지 몰라도, 결국 그 방의 주인이 되지 못 하는 불운한 정치인으로 남게될 확률이 높다. 과연 몇 달 후 일본의 정치사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돼 갈까?

   
   * 일본의 최하 인구 현 톱5... 돗토리는 전통적인 1위... 대표적 인구소멸 지역으로 모든 면에서 가장 힘이 약한 지역이다. 이런 곳에 기반을 둔 이시바 시게루가 총리까지 된 건 하나의 사건이긴 하다.

아래는 2018년에 <크리스찬 프레스>라는 저널에서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을 인터뷰한 기사 내용이다.
https://www.christianpress.jp/ishiba-shigeru/

【인터뷰】 중의원 의원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씨 “자신만 올바른 게 아님을 기억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분쟁을 해소해 가는 첫걸음” 2018년 9월 5일

크리스천 의원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씨를 (2019년) 8월 30일에 와타베 마코토(渡部信) 본지(크리스천 프레스) 발행인과 야마키타 노부히사(山北宣久, 전 일본기독교단 총회의장) 씨가 중의원 제2의원 회관을 찾아, 이시바 시게루 사무소에서 인터뷰하였다. 이시바 씨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지친 표정 하나 없이 인터뷰에 성실히 응해 주었다.

■ 크리스천 의원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정치에 임하고 계십니까?
: 저는 신 앞에서 스스로의 부족함, 그리고 잘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바로 잡아 주십시오”, “귀한 일에 사용해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 특히 정치가로서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 유럽에서든 아시아에서든, 그리고 미국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분쟁을 없애 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서로가 신 앞에서 무력한 존재임을 공통으로 인식하여, 자신만이 올바르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약한 사람을 위해 일하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최대한 공유하고 싶습니다. 항상 이런 생각을 품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 세계에는 다양한 긴장이 존재합니다. 일본이 특히 한국 등과 평화 외교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 한국의 근현대사, 한국과 일본이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모른 채, 외교적 노력을 아무리 한다 한들 설득력이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 영토 문제 등, 일치하기 어려운 점들도 있습니다만, 함께 해나갈 수 있는 것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문재인 정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지, 그것에 대해 고민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세계적으로 아동학대가 큰 문제로 대두된 가운데, 아직도 유엔(UN)에서는 ‘아동학대를 없애는 날’ 같은 것조차 없습니다. 기독교계가 협력하여 일본과 한국에 그런 날을 제정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러한 것도 (한일) 협력의 한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마지막으로 일본의 크리스천들을 향한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예정 시간을 넘겨도 사무실 책장에서 기독교 관계 서적을 꺼내 보여 주거나, 때로는 웃는 표정을 지어가면서 시종 포근한 분위기 가운데 인터뷰를 진행했다. 와타베 발행인이 “일본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정치가가 되어 주길 바란다”라고 말하자, 이시바 씨는 “저는 그런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예레미아 32:27)라고 적힌 종이를 건네자, “이 성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라면서 이시바 씨는 흔쾌히 받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서로에게 기도해가며 함께 난국을 극복해 갑시다”라고 야마키타 전 의장(일본기독교단)이 말한 뒤, 마지막으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장 10절)라는 구절과 함께 축도를 드렸다.

   
  * 이시바의 외증조부 가나모리 츠린(金森通倫)은 도시샤대학의 창립자 니지마 조의 제자로서, 일본조합교회의 대표적인 초기 지도자로서 오카야마 및 돗토리 지역 전도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


이시바 씨는 4대에 걸친 크리스천이다. 외증조부가 니이지마 조(新島襄, 도시샤대학 설립자)의 애제자였던 가나모리 츠린(金森通倫, 1857-1945)이다. 구마모토 밴드의 한 사람으로 구마모토 양학교(熊本洋学校)에서 도시샤로 전학왔다. 졸업 후에는 일본조합기독교회 오카야마교회(岡山教会)의 목사로 일했고,(1880~86), 40대에 잠시 교회를 떠나 냉담기를 갖지만, 그 후 다시 구세군이나 성결교회 등에서 활약하였다. 만년은 쇼난(湘南)의 하야마(葉山) 동굴에서 여생을 보내는 기구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가나모리의 아내, 니시야마 코히사(西山小寿, 옛 이름)는 고베에이와여학교(神戸英和女学校, 현 神戸女学院)의 제1기생으로서, 오카야마의 산요에이와여학교(山陽英和女学校, 현 山陽学園)의 창립자 가운데 한 명(초대 전임교사)이 된다. 가나모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타로(太郎)가 이시바 씨의 조부이고, 타로의 장녀인 가즈코(和子)가 이시바 씨의 모친이 된다. 부친은 돗토리현 지사와 참의원 의원 등을 역임한 이시바 지로(石破二朗) 씨이다.

이시바 씨는 모친이 다니던 일본기독교단 돗토리교회(鳥取教会, 현재 橋原正彦 목사가 시무)에서 18세에 세례를 받았다. (지금도 현주배찬회원(現住陪餐会員)이다.) 돗토리교회에서 활동하던 선교사가 시작한 아이진유치원(愛真幼稚園)에 다녔고, 돗토리대학 교육학부 부속중학을 졸업 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고교에 진학, 게이오대학까지 졸업했다. 도쿄에 머물 때는 일본기독교회 세타가야전도소(世田谷伝道所, 현 世田谷千歳教会)에 출석하며, 교회학교 교사도 담당하였다. 최근에는 국가만찬기도회(일본 CBMC 주최), 기독교 관련 강연회의 강연자로서 초청받는 일도 많다. 

   
                           * 이시바 간사장이 세례를 받고 교인으로 등록돼 있는 일본기독교단 돗토리교회

 

예장뉴스 보도부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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