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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주일 성문밖교회에서

기사승인 2024.05.01  08: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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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주년 노동주일 설교도 공모 

설교 공모 선정 이은재, 김동규, 임석교님    

우리교단 총회가 제정한 노동주일을 맞아 노동자들과 관계자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가 지난 4월 29일 성문밖교회서 있었다. 이 날 예배는 11시에 송기훈 목사(산선 비정규노동선교센터)가 요한1서 4장 7~21절을 주제로 설교했으며, 이어 방송계의 노동착취 현실을 고발하며 생을 마감한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인 김혜영 씨가 이 PD의 삶을 회고 하면 간증했다.

   
 

‘노동은 사랑이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송 목사는 산업화 이후 현재까지도 안전에 무관심한 비인간적 착취가 이어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중대산업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성경에서도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책무가 언급된 다양한 사례를 짚어가면서 독재·보수 정권에 길든 한국교회가 노동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처한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부에는 ‘노동주일 예배문과 주간 묵상집 출판기념 이야기마당’ 에 참여한 필자들이 나와 토크쇼 형식으로 이야기 마당이 펼쳐졌다. 김신약 목사(NCCK 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손은정 목사(영등포산업선교회) 송효순 집사(돌봄노동자) 이종란 노무사(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가 초대되었다. 

   
 

저자들은 노동주일 제정 65주년을 맞아 극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주·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문제에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며, 국내 개신교회들이 노동선교를 통해 노동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측은 지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3월 10일 다음 주일을 노동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현재는 노동절 앞 주일로 변경)한 이래 지금까지 전국교회가 일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와 의미에 기린다는 취지다. 이 날을 위하여 발행한 묵상집 ‘일터에서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 는 4월 마지막 주부터 5월 1일 노동절까지 복음과 노동의 가치를 알 수 있도록 구성됐다.

   
 

그러나 전국교회가 다른 총회 주일과 다르게 노동주일을 지키는 교회들이 점점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따라서 총회적으로 기왕에 결정된 노동주일을 전국교회가 지키도록 하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총회는 총회장 목회서신과 이런 의미를 기리는 성경본문, 설교안을 전국교회에 배포했는 데 지금은 시들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 노동주일을 지키고 드려진 헌금도 총회에 보내서 이런 일을 하는 선교단체에 보내졌는 데 지금은 손을 놓고 있어 안타깝다. 모든 교회들이 낮예배가 아니더라도 저녁이나 그 주간에 자유롭게 노동주일을 지키도록 장려되는 일이 시급하다. 이 업무를 하는 곳은 사회봉사부인데 관심이나 있는 지 모르겠다. 

따라서 영등포산선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런 예배에 동참하는 교회가 증가하도록 환기 켜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이번에 맞는 노동주일은 유엔(UN)이 지정한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로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자수 1위로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한 노동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노동주일을 맞이하여 영등포산선은 제 4회 총회제정 설교문 공모한 바 있다 그 취지는 온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역인 노동에 동참하며, 힘든 노동을 천시하고 멸시하는 문화를 바꿔가며, 이윤을 이유로 사람인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소외시키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다. 이번에 공모된 이은재님이 낸 "생명을 택하라" 라는 제목의 설교를 소개한다.  

 

                                  다음은 설교 전문 이은재 님 

                                            생명을 택하라 마가복음 5장 1-20절

[작성취지 및 주제]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셨다. 더러운 귀신의 특징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들고, 그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간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은 재산의 손실을 보게 되고, 여기에 대한 반감으로 예수님을 쫓아낸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생명과 물질을 바꾸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생명과 재물 중에 생명을 택하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의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하셨습니다. 거라사가 속한 데가볼리 지역은 이교도의 신전이 있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곳이지요.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은 굳이 바다를 건너 이방 땅을 밟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금기를 깨고, 부정하다 여겨지던 이방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요, 그의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무서워서 묶어두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귀신 들린 사람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덤 사이에서, 또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더러운 귀신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더러운 귀신, 악한 영은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가족과 이웃과 정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고 살아가던, 소소한 일상을, 귀신이 빼앗아 갑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가고, 그를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귀신, 더러운 영이 하는, 더러운 일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얼핏 보면 이 행동과 말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귀신은 예수님이 자신을 쫓아낼까봐 두려워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이미 예수님은 그 귀신을 향해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과 귀신으로 고통받는 불쌍한 사람을 분리시켜서 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파괴하고 망가뜨리는 이 귀신과는 타협하실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하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귀신의 이름은 “군대”였는데요, 그 수가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예수님께 요청하는 것이 있는데요,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귀신은 가까운 산 곁에서 먹이를 먹고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허락하에, 더러운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에게 들어갑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13절 하반절 말씀처럼, 이천 마리 정도 되는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합니다. 귀신은 어떤 대상 안에 들어가든지, 그 대상을 파괴하고 죽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스스로를 해쳤던 것처럼, 이천 마리 되는 돼지 떼는 바다를 향하여 비탈길을 내리달아서 바다에서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왜 귀신의 부탁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를 죽이고 남에게 재산상의 손해까지 끼치면서 이런 부탁을 들어주셨는지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천국에 가면 꼭 여쭤보아야 할 질문인데요. 그래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다름이 아닌,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도 존엄하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려 고통받는 한 사람의 생명과 그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물론 동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소중한 피조물이고요, 그 생명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이 돼지들은 생명이 아닌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이, 2천 마리 돼지로 표현되는 막대한 재산보다 훨씬 소중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의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자본주의도 연약하고 악한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 중 하나일 뿐이지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조금 더 효율적으로, 조금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에 대해서는 잠시 눈을 감는 것을 합리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언젠가 지하철역에서 혼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살 젊은이가 전동열차에 치여 사망했던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2인 1조 작업이 원칙인데, 작업의 경제성, 효율성을 따지느라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비정규직의 꽃다운 청년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지요. 유명한 제빵공장에서 일하던 20대 여성이 기계에 몸이 끼어서 숨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회사는 계속 빵을 만들어서 팔아야 하기때문에, 사고 다음 날, 사고가 났던 피 묻은 기계는 흰 천으로 덮은 채, 그 옆에서 다른 직원들에게 계속해서 빵을 만들 것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죽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회사는 직원들의 안전, 건강, 평안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빵을 빨리 만들어서 납품기일과 수량을 맞추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나라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많은 차별과 무시를 받으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한국 사람과 외국인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 것이 국제노동기구와 국내법에 보장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때로는 불편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요,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는 한 사람의 생명, 한 사람의 인권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이익을 뽑아내면, 그것이 가장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세상살이가 참 힘들지요, 직장에서 일하며, 또 가정에서 살림하면서, 돈과 매일매일 씨름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목소리에 동화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천 마리 돼지 떼를 손해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다고, 우리 예수님은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두고 먼 길을 떠나는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론에서 교회에 대한 기사들을 쓰면 그 밑에 악플이 참 많이 달리지요? 저는 가끔 그것들을 찬찬히 읽어봅니다. 그렇게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을 들으면서, 참 많이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기대하는 것이 있구나” 비판과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무관심’입니다. 한국교회, 또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면, 아예 관심이 없다면, 아마 비판하고 비난하는 댓글도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좀 달라야지, 예수믿는 사람이라면 좀 다르겠지”

이 세상은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가 상식처럼 자리 잡아 가고, 돈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날마다 실감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교회는 다르구나, 목회자는 다르구나,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르구나, 교회는 돈보다 생명이구나, 한 생명 살리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세상과 다른 선택을 하는구나. 교회는 돈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여전히 세상은 우리 교회를 향해, 이러한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자 돼지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일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런 일을 자꾸 벌이면, 자신들에게 경제적 손실이 생길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려서, 소리 지르며, 자기 자신을 해하던 사람이 온전하여진 것을 보면, 우리 마을 사람이 그렇게 온전함을 입었으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재빠르게 자신들에게 닥칠 경제적 손해를 계산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또 다른 아프고 병든 이들이 회복되기를 간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생명의 소중함, 존엄함에 우리는 동의하며, 그 길을 따를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신가요? 그 사람의 국적과 경제력과 그 사람이 처한 어떤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음을,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나요? 한 사람의 생명과 그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그 어떤 소유물도 상대화시킬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지요? 우리가 여전히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에 사로잡혀서, 효율적으로 많은 이익을 얻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데가볼리 이방인들처럼 예수님을 쫓아내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18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제 배에 오르셨습니다. 한 생명보다 돼지 이천 마리의 재산이 더 소중했던 데가볼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내려 했는데,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모습이 대조적이지요.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저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몸소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귀신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데가볼리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새생명 주셨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산을 지키느라 예수님을 쫓아낼 때,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처럼 한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연약하여 고통 중에 있는 한 사람이 온전함을 얻는 일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이 세상의 물질만능주의를 따라 살아가며, 타인의 생명의 존엄성을 짓밟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노동주일을 맞아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대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더 많은 이익과 효율을 위해서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혹시 더러운 귀신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이 우리의 노동의 현장에 있지는 않나, 둘러봅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고, 인간다운 삶이 회복되도록 도웁시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줄 믿습니다. 

   
 

 

예장뉴스 보도부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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